극장판 세일러문 R 논문 번역

9.「한 사람 몫 하는 아이」가 될 수 없었던 젊은이들

Endy83 2009. 1. 25. 07:06
 

     9.「한 사람 몫 하는 아이」가 될 수 없었던 젊은이들:
애니메이션 팬의 기본적 퍼스널리티 성립에 대한 1 가설 :
말러의 이른바「재접근기」에 있어서의 자발성의 철거


    


 이렇게, 피오레와 키세니안의 관계를 통해 애니메이션 팬의 부모님과의 관계와 성장이력의 문제로의 주의를 환기하게 되었지만, 여기서 잠시『세일러 문』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서, 애니메이션 팬의 퍼스널리티와 그 성장이력적 요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정리해 말해 볼까한다.


 일반적으로, 오타쿠족에 대해,「언제까지나 어린애인 채로 있고자 하는 존재, 어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모라토리엄 인간」이라는 표현이 즐겨쓰여지곤 한다.  필자는 이「통설」에 대해 얼마간의 위화감을 항상 느껴 왔다.  그것은, 그들이「어린애 같다」「어린애인 채로 있고자 한다」식으로 불리워질 때의「어린애」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가 심히 애매한 상태라, 여기에 어떤 류의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천진난만한 아이 시절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타쿠들이 꿈꾸는 이상으로서의「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모습은 현실의 어린이의 모습과는 사실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실제 현실 속의 유치원생을 우연히 가까이 만나게 되면, 「왁왁 시끄럽고 추접스러워서 성가시다」라며 악마적 존재와도 같이 거북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자기모순을 태연히 범하고 있는 것이다.『크레용 신쨩(짱구는 못말려)』의 주인공은, 오히려 현실의 유치원생에게 내포된 악마적 측면을 과장하여 만화로서 풍자된 존재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타쿠층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들은, 오히려「한 사람 몫의」어린이다운 어린이가 되는 것을 심히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방해받은 채로, 형식 상으로만의 성장에 쫓겨 왔던 존재는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더욱이 그들에게 어른 사회로의 적응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내재된 일그러짐을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일그러짐을 견뎌낼 수 없게 되는 것에의 방위·저항으로서 오타쿠들은「어른이 된다는 것」을 거부하고, 모라토리엄(moratorium)적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진정한 의미로「아이」로서 이 세상에 축복받으며 태어난 경험을 아직 가져 본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것을, 미국의 여성 소아과 의사 말러가 수많은 어머니와 아이의 상호작용을 지속적으로 직접 관찰한 데이터에 근거해 확립한『분리-개체화』이론1)의 발달 도식에 적용시켜 파악해 보고자 한다.【주】


 【주】위니캇이나 말러 등의 발달 조기 대상 관계론은 기본적으로「양자 관계」론이다.  여기서는 오이디푸스기 이후 3명째로 등장하는 인물로서의「아버지」의 고유 역할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이와의 관계에 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도 육아에 관련되는 경우에는「어머니」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위니캇(1965) 자신의 문헌에서「어머니」라는 말을 이용하는 경우에는,「어머니적 역할을 취하는 인물」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석에 달고 있다.  예를 들면 「good enough mother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남성  심리치료사」라는 표현조차 가능하다(심리요법가로서의 위니캇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확실히 그러한 인물이었다). 

  즉「어머니」라는 말에는 남성 즉 아버지나, 가족 이외의 양육자도 포함된다.  나아가,「유방」이라는 표현은 꼭 인공영양공급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하의 본문에서도 이를 따른다.


 오타쿠의 경우에도, 많은 경우에서 말러의『분리-개체화』이론에서 말하는 생후 일년 미만의『공생기』에 있어서의 부모와의 상호작용은, 기본적으로는 위니캇이 말하는「거의 충분한(good enough)」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아니한가.  즉, 젖먹이 중에 어떠한 욕구불만이 생겼을 때에,「마치 자신이 욕구하는 것이 대상을『창조하는』듯이」, 정확하게 유방으로 상징되는 공급물이 주어지는 과정이「거의 충분하게」이루어져 있는 듯 여겨진다.


 이 시점에서는, 유방은 반드시 자신의 외부에 있는 현실 존재라는 점이 충분히 이해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우유를 먹고 싶다」라는 상상을 하면, 마치 마법의 주문에 따르듯이 눈앞에 유방이 나타나는 것이지, 유방이 자신의 상상이 낳은 환상인가, 외부의 객관적 실재인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은 젖먹이에게는 없는 것이다2).


 이러한, 젖먹이의 생리 상태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양육자의 고도의 공감성은 점차 줄어들어, 젖먹이는 점차 욕구 불만이나 불쾌한 상태를 장시간 참아야만 하게 된다.「자신의 마음 속에는 확실히 욕구가 있건만, 그것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채워지지만은 않는다」는 체험을 통해 젖먹이는, 자신의 단순한 연장도 일부도 아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자기가 아닌」외부와 타인이 존재함을 서서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자신이 일정한 자발적 몸짓으로서의 움직임을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내 욕망이 채워진다는 체험은 견지된다【주】. 대체로 오타쿠의 경우에서도, 이런 과정 속에서 외부나 양육적 타인을 향한「기본적 신뢰감」자체는 어느 정도는 형성되어 결코 바린트가 말하는「기저 결손」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주】덧붙여서, 생후 4개월경부터, 어머니 스스로의 몸이나 직접적인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순간에도, 특정 이불이나, 아기용 젖꼭지나, 자신의 손가락이나, 거의 외침에 가까운 자발적인 발성 등이 특별한 애착의 대상이 되고, 어머니도 그것이 젖먹이에게 있어 특별한 대상임을 존중하여, 함부로 다루거나 세탁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젖먹이는 그 대상에의 애착에 몰두하고 있는 한 어머니와 분리되어 있다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을 위니캇(1971)은「이행 대상(transitional object「과도 대상」이라고도 번역된다)」이라고 부른다.  이「이행 대상」이라는, 정신 분석에 관심을 가진 심리요법가 사이에서는 핵심 콘셉트로서 주지되는 개념은, 단지 이불을 빠는 것이 유방의 대용품이 되어 아이의 불안이 진정된다는 점을 가리키는 듯 단락적인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단순한 공상이나 내적 욕구의 투영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물이기도 하며,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그 자신처럼, 자신의 의지로부터 분리 독립한「타인」으로서의「외적 대상」도 아닌, 말하자면 현실과 공상의 중간에 위치하는 과도적·이행적(transitional)대상, 거기에 그 젖먹이의 심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특별한 가치를 어머니에게도 인정받은 대상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오타쿠가 집착하는 수집물 등의「물건」과의 관계, 그리고, 피오레의 마모루에게서 받은 장미꽃을 향한, 마치 타인과의「연결」에 의한 안도감 모두를 그「물건」으로 상징하는 듯한 까다로움은, 이와 같이 자신이 도와줄 사람도 없이 고립된 채 방치되어 있다는「분리 불안」·「버림받은 억울함」에의 직면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이행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오타쿠의 경우에는, 그「이행 대상」을 타인-세계와의 연결로서 인정해주고 있는 것은, 이미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라, 여기서「키세니안적 대리모」라고 칭하는 것이 된다.

 

  어쨌든, 젖먹이의 운동 기능은 이러한 사이에도 급속히 발달해 나가서, 욕구의 충족은 완전한 수동적 물건으로부터, 자발적·능동적인 활동성이 관여되는 것으로 급격하게 변동한다.


 다음은, 생후 1년 전후의 말러가 말하는「연습기」인데, 이 시기는 조금이나마 직립 보행이 가능하게 되어, 젖먹이의 마음 속에 왕성한 외부 대상으로의 자발적인 관심과 탐색 욕구가 생겨나서, 흥미를 가진 대상을 향해 쏜살같이 걸어가서는, 뭐든지 손에 들고 이리저리 만져 보거나 입에 넣거나, 같은 대상을 싫증도 내지 않고 쳐다보거나 한다.


 이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걷다가 넘어지거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쳐 아픔을 겪는 등의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든, 부모에게 몇 번 야단을 맞든, 질리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시도되는 외부 세계의 탐색이며, 거기에 이「연습기」에 있어서는, 부모 쪽을 되돌아보고 반응을 확인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시야에서 부모의 모습이 안보이게 되더라도 이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대상에의 탐색이나 이리저리 만지는 데에 몰두하는 순간이 증가한다.  이것을 말러는,「세계와의 바람기」라고 부르고 있다.


 무엇보다, 이 단계에서는 젖먹이의 주위 세계는 아직 모체의 자궁적인 공간과 융합한 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탐색 속에서의 아이의 고양 상태는 지극히 과대한 자기애성을 띠고 있다.  이 단계에 있어서는, 이후에 오타쿠가 될 아이는, 적어도 당초의 자발적 활동 수준은 기본적으로는 평균치 내지 그 이상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오타쿠의 독특한, 한 번 관심을 가진 대상에의 강렬한 몰두와 집착은 생길 리 없다).


 보통 부모는, 아이의 그러한 자발적인 활동을, 위험한 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때에는 꾸짖더라도(이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오히려 아이가 성장해 가는 모습으로서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며(좋은 의미로의「사랑에 눈먼 부모」성), 감정이입적으로 말을 걸어서3), 가끔은 아이의 탐색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는 등의 대응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런 한편, 양육자는, 아이에게 위험이 없을 것 같으면「방치」하여, 아이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고 자신의 관심거리나 가사 등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부모와 아이가 함께 있으면서도 각각의 관심거리에 안심하고 몰두하고 있을 수 있는 상태, 즉「함께 있으면서도 각자가 안심하고『혼자 있을 수 있는』상태」는, 모자의 분리 개체화를 위한 전제로서 필수불가결한 체험이다.  즉, 타인과의 관계 안에 있으면서 거기에「자립」상태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의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위니캇(1965)은 이것을「혼자서 있을 수 있는 능력 (ability to be alone) 」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물론, 보통 부모라도 때로는 그러한 아이의 왕성한 활동성에 대해서 초조함이나 불안을 가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곧바로「개입」하고 싶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모두 마이너스라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아이가 분명한「타인」이라는 점도 머지않아 자각할 수 밖에 없는 이상, 분리-개체화를 위해는 이러한 경험은 아이에게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4).


 그러나, 이와 같은 자발성의 발현으로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는 경험이 아이에게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앞에 서술한 것과 같은, 자발성의 발현을 부모가 받아들여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경험이나, 간섭받지 않고 방치받는 경험이 선행되며 이것이 비율적으로 우위로서 겪어진 경우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젖먹이의 자발적 활동성에 간섭적·억제적인 대응을 하는 경향이「오타쿠」의 부모의 경우는 평균보다 약간 현저히 많다는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싶다.  여기서 말하는「간섭」에는, 일견 긍정적이면서도, 아이의 행동에 너무 참여하는 경향, 혹은 부모의 소망을 아이에게 투영해 앞질러 채워 주려는 경향만이 과잉되어, 아이 자신의 자발적 탐색에 앞질러 너무 여러 가지를 해주거나 부모가 기대하는 그 어떤 활동으로 너무 끌어들이려고 하는 경향도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이것대로 아이의 자연스러운 자발성의 발로를 죽이는 일이다.


 아마 부모가, 아이가 마음대로 자신으로부터 분리-개체화하여, 아이에게「버림받는」것이 두려워서,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매달려 컨트롤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것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부모 쪽에, 아이가「부모를 떠나가는」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칫하면「애정」「아이의 조기 교육」이라는 이름의 과한 간섭을 낳는 것이다.


 아이가「……을 갖고 싶어」「……해줘」라는 식으로 끈질기게 이기적으로 조르지도 않고, 부모가 주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언제나「얌전히」부모가 주는 것을 받기만 하면 이는 대단한 위험 신호이다.


 최소한, 성장하기 시작한 새싹을 일부러 그러잡고서 억지로 끌어내려고 하는 것처럼「창조성을 늘리자」라는 등은 쓸데없는 참견인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성장 능력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다고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 비료로 속성 재배 된 식물은 언뜻 보기엔 잘 성장하지만 과실의 맛에 깊은 맛이 없으며, 기후가 살짝 급변해도 시들어 버린다.


 이「연습기」에는, 시야 안에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에 아이는 비교적 무관심한 채로 탐색에 몰두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지만, 이 시기에 이어지는「재접근기(생후 15-22개월)로 들어가면, 젖먹이는 외부전체로부터 독립한 개체로서 양육자 개인을 인지하는 정도가 더욱 높아져서, 그러한 자발적인 세계의 탐색 도중 양육자가 시야에 없다는 점을 문득 눈치채면, 엄청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버림받음의 억울함」이며,「극장판」내에서는, 마모루의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어린 피오레와의 이별 속에서 상징되어 있다.


 하지만, 이 불안에 압도되어 있는 때란, 아이가 부모로부터의 자립, 즉 분리-개체화를 달성하는데 있어서의 결정적인 갈림길인 것이다. 「버림받음의 억울함」은, 부모로부터의 심리적인「분리 불안」이기도 한 것이다.  분리 불안으로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 그것은 심리적인 의미로서의 출산 체험, 즉, 부모의 심리적「자궁」과 일체화된 안식 상태로부터 외부로 낳아져 고립된 자아를 직면하여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인 것이며, 아이가 진정한 의미로서「이 세상 속에 태어나는」탄생의 시기란 바로 이 때다.


 원래, 이런 때 울며 아우성치는 아이를 장시간 방치하는 등의 경험만이 갑자기 반복되면, 아이의 마음 속 상처는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자신을 낳은「세계」와「타인」을 무섭고도 박해적인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고착되어, 인간을 신뢰하고 교류하는 능력이 기본적인 부분으로부터 침해되고 만다.


 고로, 당초는 아이가 혼자서 외부를 자발적으로 탐색하던 도중에 갑자기 불안해져 울기 시작하면, 그렇게 시간을 끌지 않고 양육자가 나타나 안아 주는 관계가 바람직하다.  이러한「잠깐 있으면 반드시 양육자가 구해 준다」는 체험 속에서, 아이의 마음 속에는 이전과 같이「마법처럼」만족시켜주는「공생 관계」는 없다 해도, 혼자가 되더라도 만일의 경우에는「타인」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은 자신을 배려해 준다는「기본적 신뢰감」이 형성되어 이에 따라 시야에 양육자가 없어도 서서히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는 현상이 다시 생겨난다.


「지금 현재『혼자』라는 것이 고독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앞으로도 혼자일지도 모른다』라 느낄 때에 고독해지는 것이다(이쿠하라,1994)」


 울기 시작하고서 양육자가 안아 주기까지의 시간도 자연스럽게 점차 길어질 것이나, 아이는 점차 그런 일들에 태연해져, 마침내는 조금 전까지처럼, 양육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 불이 붙은 듯이 패닉이 되는 현상 자체가 감소하고 만다.


 이리하여「재접근기 위기」는 극복되고,「대상의 항상성의 확립」에 이른다.  


 이와 같이 혼자 있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경향이 다시 감소한 상태는, 앞에 서술한「연습기」에 있어서의, 양육자로부터 멀어져도「세계」를 탐색하는 데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과 언뜻 닮아 있다.  그러나「연습기」의 경우에는, 탐색하는 외부 그 자체가 아이에게는 자궁내의 체험인 듯 인식되어 있는 정도가 아직 꽤 높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 쪽을 돌아보지 않고 돌아다녔던 것이어서,「재접근기」에서 버림받는 불안이 극복된 후에 양육자와의 사이에 확립되는, 서로 분리 독립한「타인」끼리의 신뢰 관계에 근거하는, 부모로부터 멀어져도 불안해하지 않고 행동하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재접근기」의 위기적 단계에 있어,「버림받는 불안」으로부터 부모가 시야에 없어서 다시 울려고 했을 때, 그 때까지도 아이의 자발성의 발현 그 자체를 사랑하고, 신뢰하여 받아들여 온 어머니라면,「어쩔 수 없네」라는 느낌에 가깝게 미소지으면서, 어떤 종류의 여유를 가지고서「왜 그러니?」라고 말을 걸며 껴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딱히 열이 났다든가, 쉬를 했다든가, 다치거나 해서 울기 시작한 것도 아닌 듯하다.  부모가 어르는 표정이나 어조에는 더욱 여유가 있어서, 암묵적으로「괜찮아,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너는 뭘 잘못해서 벌을 받은 것도 아니야.  나로부터 자립한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그렇지만 지금 너는 아직 연약하니까 혼자가 되면 불안해지는 것도 받아 들여줄게」라는 메세지가 담겨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이의 자발적 활동성을 기본적으로는 수용하고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주며 촉진하면서도, 아이의 불안까지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해주는 부모가 있는 한편, 다음과 같이 문제 있는 반응밖에 취하지 못하는 부모도 있다.


 즉, 이 단계에서, 만약 부모 쪽에 아이로부터 자립할 마음의 준비가 없어서, 아이를 자신과는 분리 독립된 자발성을 가지고 있는「타인」으로서 존재 그 자체를 축복하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 부모가, 아이의 성장과 자립에 의해 아이로부터「버림받는」불안을 느끼고 있었다면? 혹은, 부모 자신이 어릴 적부터 외톨이가 되었을 때에 앞에 적은 여유 있는 어머니와 같은 태도로 대접받지 못한 경험만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면 어떨까?


 아이가 부모의 시야에서 떨어진 곳에서 불안으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본 순간, 부모의 마음 속에서도「이상할 정도의」불안이 환기된다.  앞서 언급한 어머니와 일견 비슷하게「왜 그러니?」라고 말을 걸어본다 해도 부모가 내는 분위기 그 자체가 묘한 절박감과 여유 없음과 동요로 가득 차 있으리라.  울고 있는 아이도, 이 때 이렇게 해서 부모마저도 패닉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직감할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혼자 걸었다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지금도 받쳐주고 있는 어머니를 이렇게까지도 불안에 빠뜨리는 것인가? 아이는 자신의 불안과 패닉에 달려와 준 부모가「따뜻하게 확실히 달래주었다는」안심감보다, 자신이 이러한 불안이나 패닉을 체험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으로 결국 심각한 쇼크를 받아 더욱 불안정해지게 된다.


 「어머니의 반응은, 자신이 자발성을 발휘한 것 자체에 대한 은 아닐까?」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모는, 아이가 그러한 자발적 충동을 철회했을 경우에 처음으로 수용하는 듯한 반응을 하게 된다.


 「엄마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엄마가 해도 된다는 것만 하고 있으면, 그런 경우에 한해서 사랑해 주겠다」라고 암묵적으로 교육하게 되는 것이다5).


 후자와 같은 반응이 반복되면, 아이 안의 신체적·충동적·자연발생적인 표출성과 결합된, 위니캇의 이른바『참자기(true self)』의 형성 그 자체가 저해되어 부모와 자식의「분리-개체화』는 촉진되지 않고, 공생적인 단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하여, 양육자나 주위가 요구하는 행위나 감정만을 표출하는『거짓자기(false self)』에 의한 적응만이 발달한다.


 물론 이「재접근기」이후 아이가 더욱 성장하여 개체화하면, 양육자는 아이가 보다 어렸을 적의 거의『공생적』관계 속에서의 고도의 공감성을(아마도 유전자의 프로그램에 따라) 점차 상실하게 되어, 자신의 에고이즘을 점차 우선시하게 되거나, 아이의 자발적인 활동성이나 호소에 대해서 양육자가 어떠한 간섭이나 금지를 내려서 아예 부모가 기대하는 활동을 강제하거나 하는 경향은, 보통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오히려 격렬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재접근기」에 있어, 자발성을 기본적으로는 수용 받고 자란 아이의 경우에는, 그 이후에 관해서는, 그러한 자신의 자연발생적 자발적인 소망충족에의 욕구를 양육자로부터의 금지나 강제에 저항하면서 얼마나 끈질기게 실현하는가에 대해, 부모나 형제나 친구와의 끝없는 싸움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나아가 몸을 던질만한 개체화된 자아의 잠재력 개발을 벌써 마친 상태이다.


 이리하여, 주위와 타협하는 사회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약아빠지기까지 한 교활함까지 가지고서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욕구도 상당 정도 채워나가며 만만치 않은 대인관계의 기능을 닦아 가는 것이다.  교환 조건을 붙이거나 변명을 하거나 교묘하게 응석부리거나 친구와 한통속이 되거나 형식상으로만 사과한다거나 하는 대인적인 전술을 숙달해 가는 것이다6).


 그런데,「재접근기」에, 자연 발생적 자발성을 오히려 철거하지 않으면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경험만이 우위가 되어 버린 아이의 경우에는, 이 시점에서 선선히『거짓자기』에 의한 적응만이 우세하게 되어,「손댈데 없는『착한 아이』」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 주로 마스터슨(1972)에 근거한다.


2) 어린 시절의 마모루에게 있어서 피오레와의 만남이 이와 같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안가는 애매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에 주목.


3) 이「말걸기」에 대해서는 18절에서 서술한다


4)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연히 부모는 이러한 반응을 취하는 경우가 증가한다.  이것은 원숭이 등의 부모자식 관계에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5) 이러한 부모 자신이, 어릴 적에 자발성을 수용 받지 못하고, 타인이 인정하는 것만을 수행하는 삶의 방법에『안주하고』있었던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아이가 발휘하는 자발성에도 과민히 불안해져, 수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6) 필자는, 이러한「자연 발생적 욕구」와「사회적·대인적인 전술의 능력」을 통합적으로 기능시키는 자아 기능 전체를『참자기』라 부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