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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개체화된 요구의 철거와『거짓자기』의 형성 

Endy83 2009. 1. 25. 05:51
 

   10. 개체화된 요구의 철거와『거짓자기』의 형성 

 


 

 『거짓자기』라 함은、마치 그 사람이 자신의 본심을 자각하면서 의도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듯이 오해되기 쉬우나, 오히려 가면 안쪽에 본심이 따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그 자체에 처음부터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는 자신 안에 내재된 구체적․자발적 욕구에 스스로 액세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액세스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액세스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고 있지 않다1).


 즉, 그들 중 대부분은 편리하게도, 건강한 정상인으로부터 신경증 수준의 인물 같이「참자기는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고민하는 일조차 없는 인물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재접근기」에 있어서의 개체화 충동의 철거와『거짓자기』의 형성은, 단순히 욕구의「억압」에 동반되는 방위적인 신경증적 자아형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일 조금 아이가 성장한 단계, 즉 분리-개체화한 아이다운 욕구가 이미 충분히 수용되고, 발달한 에 부모나 주위로부터 금지를 받았을 때에 발생하는 것이「억압」인 것이다.


 이것에 비해,『재접근기』에 있어서의 개체화를 향한 충동을 철거하는 경우에는, 자기자신의 것으로서 자신의 욕구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발달과정 그 자체가 사전에 제지당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개체화된 욕구가 확립된 후에「억압」당한 것인가, 아예 조기에 개체화 그 자체가 저해되어『거짓자기』가 형성된 것인가 하는 점이야말로, 후에 심리적 장애가 발생할 경우에, 소위 말하는「신경증」정도에 끝날 것인가,「경계성」인격장애를 띨 것인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된다.


 즉,「억압」의 경우에는, 억압하는 방위기제를 해제 가능하다면 자연히 그 사람 나름의 개체회된 욕구를 밖으로 표출시킬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그것을 사회성과 절충시킬만한 자아의 확립을 향해 노력하면 된다고도 할 수 있다(이런 표현이 과도한 단순화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만).


 그러나, 아예 발달 조기에 개체화 그 자체가 저해당한 경우에는, 만일『거짓자기』의 자물쇠를 깨부숴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개체로서의 욕구나 불안을 체험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 매우 취약하고 미분화된, 심리적으로는 자궁내의 태아와 같은 존재밖에 남지 않게 된다.


 「내가 그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나는 그것을 싫다고 느끼고 있다」…그런 인물은 (적어도 현실 세계 속에서) 이와 같이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체험하는 것 자체를 견뎌내지 못한다.  세계의 한복판에서, 항상 그 어떤 욕구나 불안을 느끼고 있는 고독한 존재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체험 그 자체를 자아가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체험에 직면할 수 있는 상태로 빠지는 것을 미리 무의식적으로 교묘히 자꾸 회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는 뒤에 서술하겠지만, 그것을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두가지 방략(方略)으로 달성하고자 한다.  즉, 한 쪽의 극은,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곳까지 현실으로부터『퇴각』하여 최소한의 현실적응을 당면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거기에 현실과의 관계의 파탄을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발생시키지 않는 식으로 실현할 수 있을만한 장기적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정반대의 극은, 주위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내 줄 만한 완벽한 현실적응(소위 말하는「과잉적응」)이라는 방향으로,『거짓자기』를 고도로 형성하려 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두가지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만일 전혀 도망칠 길이 없는 상황에서『거짓자기』내부의 매우 취약하고 미분화한『참자기』가 직접 외적 현실에 노출되는 상태가 강렬히 또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그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그 어떤 신체증상적 반응을 일으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경계선, 즉「자아경계」가 파탄나 정신병으로도 오인될 정도의 급성 인격 혼란에 일시적으로 빠지기를 반복하여, 주위 사람들이나 치료자는 거기에 휘둘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경증적인 사람에게는 유효하게 기능하는, 자유연상과 저항의 철저적 조작을 중심으로 삼는 표준형 정신분석기법이나 단순한 수용적 경향만으로는 성과가 나지 않는 채로 교착에 빠지거나 혼란에 빠지거나 하는 일이 많다.  겉보기에는 치료가 성공하는 듯이 보였던 것이, 실은 치료자의 마음에 들 만한 방향의 새로운『거짓자기』를 as if 적으로 형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바로 이전과 같은 부적응이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런 인물일지라도「나는 ○○하고 싶다(는 싫다)」라는 표현을 쓰는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내실은「나는, 당신(또는 주위의 타인)들이 내가『○○하고 싶다(는 싫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를 버릴 것이라는 시사(示唆)를 받았다고 느꼈음에 , 거기에 따릅니다」라는 것이다。


 오해가 없도록 말하자면, 이러한「재접근기」에 일어나는 개체화를 향한 충동의 철거와『거짓자기』에 의한 적응 타입을 가진 인물의 경우, 본인이 자각 가능한 식으로 타인이나 주위에「영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당시에는 딱히 주위에『영합』할 셈도 아니었습니다」…만일 본인이 그때까지의 자신을 이와 같이 자기 분석 가능했다면, 그 사람 안에 개체화된『참자기』가 이미 상당한 정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치료는 이미 상당히 성공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된다.  철이 든 이후, 본인의 안에서,「○○하고 싶다」「○○하라고 명령받는다」라는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밖에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정신적 인격적 상호작용에 최저한으로 필요한 개체로서의 자아 그 자체가 너무나도 미성숙한 상태로, 외부 세계로부터의 자극과 내부로부터의 자극을 미분화한 정서적 카오스로밖에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주】


 【주】「미분화한 카오스」라 함은, 포커싱에서 말하는 펠트 센스로서 체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펠트 센스에서의 포커싱의 경우에는, 그 막연한 감각을 자신이 느끼는 하나의 전체적인 대상화된 감각으로서, 어떤 여유로움을 느끼면서 휩쓸리지 않고 계속 접촉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이다.  이미 서술했듯이,『거짓자기』에 의한 적응이 우위에 선 사람은, 펠트 센스와 함께 할 만한 적절한 타이밍을 발견할 능력이 몹시도 미성숙한 상태이다.  몇 번을 훈련해도「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지간한 배려를 가지고 상호작용을 가지지 않으면「너무 과하게 느껴서」그것도 그것을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위기적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


 【주】마스터슨,1981에서 밝히고 있듯이, 위니캇 스스로도 마스터슨과는『참자기』『거짓자기』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에 다소 의견차가 있었다고 한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마스터슨 쪽에 가까운 정의에 기초하여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1) 포커싱 트레이닝에 있어, 내부의 막연한 신체감각, 즉 펠트 센스에 접하게 된다는 점에 특별한 어려움을 동반하는 타입의 사람들 안의 어떤 부분이 그야말로 이와 같은『거짓자기』에만 적응된 이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