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세일러문 R 논문 번역

12. 오타쿠가 지키려 하는「순수함」의 정체

Endy83 2009. 1. 25. 05:12
 

      12. 오타쿠가 지키려 하는「순수함」의 정체


 다만, 오타쿠가「『순수함』의 상실」을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순수함」이란, 반드시「개체화 된 욕구」의 발로나『참자기』를 잃고 싶지 않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경우도 많다고 생각된다.


 오타쿠는,「아이와 같은『순수함』」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아이다움」「순수함」이라는 것은, 실은「재접촉기」의 분리 불안을 극복하고 형성된, 개체화된 한 사람 몫의「아이」로서의「아이다움」의 발로가 아니라, 편하게도 아예 개체화를 향한 욕구를 철거당한 후의, 부모가 내려주는 공생적 자궁공간에서「『얌전하고』착한 아이」로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게 된 중에 느끼게 된,『거짓자기』에 안주하는 동안의 안정, 즉 자신의 욕구나 충동을「거세」당했기에 얻는 불안 없는 평안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애초부터「『얌전한』아이」라는 표현 그 자체가 형용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 아이가 비뚤어지고 거짓된 성장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증명과 같이도 생각된다.


 그러한 아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내부에 개체로서의 생생한 충동성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자아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것만 같은 이물적인 위협이라, 그러한 내적 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외부로부터의 자극 그 자체를 가능한 한 피하려고까지 하는 것이리라.  그들에게 있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욕망에 눈뜨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자신의「순수함」을 빼앗기는「외상체험」이 된다.


 오타쿠들이 두려워하는「순수함의 상실」이란,『거짓자기』를 잃고 개체화된 욕구를 종합하는『참자기』에 눈뜨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 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것이 강렬한 불안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개체화된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 「어머니되는 자」와의 공생 관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달성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순수」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모성적인 자궁공간에 자신이 의존하는 것으로 인해 개체로서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순수함」이 그러한 의존에 의해서 비로소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오로지 자꾸만 도망친다.


 …물론 이와 같은 표현을 그들에게 쓰면, 오타쿠들은 그런 의존을, 의존하는 대상으로서의 어른들이 관계된 죄의 문제로서 받아들여, 그런 식으로 순응을 강요하는 성인 사회의 혹독함이나 추접스러움을 증오하며,「자신들은 저런 식의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고 반론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순수」하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의미에서의「어른들이 관계된」죄보다도 훨씬 중대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눈치 채고 있지 못하다.


 자위행위는 과연 자신의 성적 욕망을「만족시키는」행위일까? 아니면 자신 안에서 발생하는 성적 욕망을 짜내어 싹 비워내, 스스로 세상에서「사람들에게 무해한」존재로서「복종」하고자 하는「자기거세」행위로서의 측면도 강한 것인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오타쿠가 말하는「순수함」의 실상은, 스스로가 자신의 내발적인 개체화된 욕구의 싹틈을 끊임없이 억제하여 자꾸만 자기거세하는, 자기 스스로에의 매우 잔혹한 처사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든 자기 자유라고 그들은 단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개체화된『참자기』야말로 자신의「살아 있는」감각 및 존재의 근원이라는 점을 실감하기 시작하면,「자기가 얼마나『자기자신』에게 가엾고도 잔혹한 처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던가」라며 진정으로 비탄하며,『자기자신』에게 아무리 사과한다 한들 차마 속죄해내지 못할만한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