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세일러문 R 논문 번역

* 추기:「우물 안 개구리, 그러나 하늘의 깊이를 안다」?

Endy83 2009. 1. 25. 03:42
 

   추기:「우물 안 개구리, 그러나 하늘의 깊이를 안다」?


 본 논고를 써가던 중에, 스스로가 마주하기 시작한 문제의 크기와, 그것을 논하기에는 아직도 문제의 일면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한계를 끊임없이 느끼곤 했다.


 본래는『세일러 문』이라는 작품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으로서 구상되었던 이 논문은, 구상을 진행하던 중에, 소위 말하는「오타쿠」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는 측면이 점점 비대화되어버렸다.  물론 이는, 극장판『세일러 문』이라는 작품의 내용 자체가,「오타쿠」적 인물의 심리 묘사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유니크하고, 그렇기에 더욱 학회 발표의 제재로 쓰는 의의가 있다고 필자가 판단한 것이므로, 이런 경과로 다소 형편없기는 하다만.


 그리고 본 논고가, 동인지 등의 오타쿠 서클에 대해 지나치게 네거티브한 시점으로만 논하고 있어서, 그것이 너무도 가차없지 아니한가, 그러한 대인관계의 장이 오히려 성숙을 위해 유효하게 마음을 달래는 자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아니한가, 또는 그러한 자리를「살아갈 자리」로 삼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안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겠는가 하는 지적이 있다면, 달게 받을 생각이다.


 특히 초등학생으로부터 중고생의 등교거부나 히키코모리에 대한 임상현장에서 경험을 쌓으신 분들, 특히 등교거부아의 프리 스페이스나 그룹을 주최해 오신 분 중에는, 애니메이션 서클과 같은 자연발생적인 횡적 집단의 장이 마음을 달래는 자리로서 기능하는 측면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에 기초하여 논하는 것이 가능한 분도 있을지도 모르므로, 그러한 의견이 있다면 경청하고자 한다.


 「극장판」에 있어서의 우사기와 다른 세일러 전사들과의 만남과 연대의 드라마는, 오타쿠 집단이 포지티브하게 기능한 경우의 이상적 상태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대학생 이상 연령층의 개인 면접 중심의 카운슬러(그 중에 몇 명의 애니메이션․게임․컴퓨터 매니아가 포함되어 있었따)로서의 경험밖에 없다.  말하자면 고교생 이하의 집단 괴롭힘이나 등교거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정신분석에 대한 전문교육은 어디에서도 받은 적이 없다.  본 논문에서 활용한 대상관계론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자발적인 독서의 결과인 것이다.  아마도 진짜로 중증 경계례 환자와 면접한 경험은 아직 거의 없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팬으로서도, 고등학교 시절의『야마토』이래의 팬이긴 하며, 애니메이션 잡지의 과거 10년에 걸쳐 수십권 이상 글이 실렸던 현역 투고자로, 잡지 편집부 방문이력도 있으며(작년의 『아니메쥬』지 9월호에서 필자는 단골 투고자로서 그라비아 대담을 했다), 몇 명의 애니메이션 작가나 업계인과 주로 편지에 의한 한정된 횟수의 접촉 경험은 있으면서도, 소위 말하는 애니메이션 서클이라는 것에 재적한 경험이 없다.  하루미의 코미케에 처음으로 가 본 것도 바로 2년 전의 일이다.  TV게임은 작년부터 다소 하고는 있지만, 컴퓨터 사용자도 아니다(주:94년 9월 당시).  아마도 만화를 나보다도 폭넓게 읽고 있는 카운슬러는 잔뜩 있으리라.


 아마 나의 애니메이션 팬으로서의 경력은 상당히 이색적인 부류에 속할 것이다.  아마 코미케적인 동인지적 세계에 깊게 발을 담근 사람으로부터 보아도, 나의 스테이터스는 깊다고도 얕다고도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그러나 본 논문에는, 여러 가지 한계를 품고 있으며 개별 사실에 관해서는 다양한 편견이나 일면성을 가지고 있음조차 충분히 지적가능함과 동시에, (완전 정반대를 말할 셈이다만)오타쿠 세계의 깊은 부분의 인간관계 와중에 있는 사람도, 우수한 르포 라이터나 필드 워커도, 순수한 경계례 치료의 전문가도 만들어 내지 못할 고유의 존재의의는 있을 것이리라 싶다.


 그것은 내가 극장판『세일러 문』으로, 최근 2,3년 동안 봤던 애니메이션 작품 중에 가장 감동했다(개봉 당시 극장에서 이십번 넘게 본지라, 본 논문 초고의 골자는, 비디오 등이 발매되기 전에 기억에만 의존하여 화면 전개로부터 대사의 대강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쓸 수 있는 상태였다.)는 단순한 사실으로부터 이 논문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는 이 작품에 감동한 것일까?  그 자기분석의 프로세스가 이 논문이나 다름없다.  기계적․형식적인 정신분석적 해석은 피하고, 그리고 오타쿠 세계에 대해 쓰여진 책 등으로부터 얻은「정보」를 끌어오는 것도 가능한 피하고서, 작품과 자기자신과 위니캇․마스터슨 등의 저작․내 나름의 임상 경험이, 실감상으로 꼭 맞아들어가는 지점을 차분하게 찾아서, 처음으로 말로서 써낸 것이다.


 그런 의미로는, 일면성이나 한계조차 넘어서, 완전히 지금의 내 키만큼의 논고라는 점으로부터 발생하는 독특한 설득력과 진실성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체험 과정의 스텝이 더욱 진전했을 때에는, 자연히 바꾸어쓰고 싶은 부분도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그 때에 수정 이상의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정색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일단은, 이「극장판」이라는 작품의 극히 일부를 보신 분이, 나의 논고를 읽고서 촉발되는 것을 몇가지쯤 느껴 주셨으면(또는 역으로, 극장판을 전부 보고 싶다 생각해 주신다면)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느 쪽이든지, 앞으로의 사회에 있어, 컴퓨터나 TV게임이나 멀티미디어라는 형태로, 유사현실을 매개로 하는 인간관계가 더욱 광범하고도 심화되는 것이 일반화되어, 인간의 내면에 커다란 영향을 부여해 가리라는 것은 뻔히 눈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의 이질적인 사람들 속에 발생하는 현상으로서「이 쪽의」가치관의 필터를 통해서만 일방적으로 파악하는 한, 심리임상의 현장은 이러한 현상에 어수선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으리라.


 억지로 이해하는 척을 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해가 될 지도 모른다.  테라피스트 자신의 자기일치를 지키지 못하는 곳을 수용하려고 할 것은 없다.  그런, 마음이 깃들지 않는「이해심 있는 태도」따위는, 오타쿠라는 인종은 실로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실제로 작품을 본 적도, 게임을 해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허구세계」가 어떻다던가「현실」이 어떻다던가, 핑계만 대고 있는 게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하고 논의하는 건 참 그렇다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극장판『세일러 문』영화를, 일부라곤 해도 플로어 분들에게 실제로 보여드릴 필요는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의 이 작품에 대한 선입관을 훌륭히 무너뜨려 줄만한 힘을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내용을 보고, 심리 전문가가 흠칫 할 순간만을 기대하며, 이 발표를 생각해낸 부분도 있다<웃음>.


 적어도 스스로가 컴퓨터 사용자이고 게임도 통달했으며 만화도 많이 읽고 있는 카운슬러는, 이미 성장하여 20대 중에 많이 있을 터이다.  그러한 여러분이, 오타쿠와 현실사회의 연결다리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해도 좋을 시기는 이미 와있지 않을까.  그러한 사소한 계기라도 된다면 이 발표도 하나의 의의를 다한 셈이리라.


 만일, 당 일본 인간성 심리학회서 당초는 자주기획이라는 형태라곤 해도, 이런 종류의「오타쿠」문제에 대해 검토해 가고자 하는 의식을 가진 분이 계신다면, 문학․사회학․임상심리․교육복지․조사통계 등, 어떠한 고유영역에 계시는 분이라도, 교류를 가질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필자는 여기고 있다. (9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