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 이야기/-애니메감상기

'소녀'의 태동과 [세일러문]

Endy83 2012. 7. 10. 03:45

2013년 세일러문 신작 제작을 기념(?)하여 차암 올만에 글질해 봅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라던가 뭐 이런저런 얘길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뭐 딱히 여성학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적당히 옛날에 졸업용 논문 쓸 적에 생각했던 곁가지들 중에 하나를 풀어본 것에 불과하니

너무 세세한 부분에 신경쓰지 마시고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소녀'의 태동과 [세일러문]

 

 

 

 

'영웅'의 역할은 오랫동안 많은 미디어에서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강한 남성, 혹은 그런 남성들의 집단이 내집단의 평화를 깨뜨리는 외부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런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서사구조에서 '여성'이란 대체로 '구조대상'이거나

많이 나아가야 '조력자' 정도의 역할을 맡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남성이 사회에서 일하고, 여성이 집안에서 일하는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 주효했다.

 

90년대 들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본 바깥으로부터 여성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 참여하는 물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존 질서의 붕괴를 수반하는 이러한 변화란, 당대를 사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변화의 물결은 흘러오는데, 남성이든 여성이든, 기성세대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그러나 '소녀'들은 달랐다.

이 시기에 이르러 태동한 '아이돌 문화'는 '소녀'를 수요와 공급의 주체로 성장시켰다.

 

'소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 소비하고,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상품이 된 아이돌을 보며 열광했다.

아이돌은 돈, 자유, 인기 등 당시 그들이 소유하고, 소비하고 싶었던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이는 가족을 위해 소비하고 소모했던 순종적 어머니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소녀는 더이상 순종적이지 않았고, 사회로 나아가 '영웅'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소비 주체가 된 '소녀'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심리를 포착하여 흥행한 것이 [세일러 문]이다.

 

 

당시 토에이 주식회사 대표이사장 토마리 츠토무 씨의 말이다.

"이 작품이 히트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츠키노 우사기를 시작으로 하는, 아미, 레이, 마코토, 미나코 등 세일러 전사가 가진, 현대를 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통하는 생생한 캐릭터에 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런 캐릭터들을 상품화한 장난감이나 문방구 등도 폭넓은 팬 여러분 사이에서 대인기라고 합니다."

 

 

 

 

* * *

 

 

 

 

 

 

 

 

"난 츠키노 우사기, 쥬반중학교 2학년생"

위의 대사로 시작하는 [세일러 문]의 주인공은 당시대의 소녀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상정되어 있다.

특히 원작보다도 애니메이션은 옴니버스 구조를 통해 매 화마다 소녀들의 일상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시험성적에 고민하고,

아이돌을 쫓아다니고,

다이어트, 화장 등 예뻐지는 데 관심이 많고,

백마탄 왕자님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90년대 초의 너무도 흔한 소녀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변신을 한다. 변신을 하는 순간 소녀는 '평범함'을 벗어나 영웅이 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가끔은 자신의 연인(남성)마저 구해내며, 악당을 물리치고, 최후에는 지구까지 구해낸다.

 

이로써 세일러문은 당대의 평범한 소녀들의 마음 속에 조금씩 싹트기 시작하던

막연한 영웅심을 처음으로 당당하게 외치는 존재가 되었다.

 

 

* * *

 

 

 

 

 

 

 

 

그래서, 그 시절 세일러문은 '미소녀전사'여야만 했다.

 

 - 미 : 소녀는 '메이크업'을 통해 미소녀가 됨으로써, 현실 소녀들의 '아이돌'로 기능하게 된다.

 - 소녀 : 소녀의 감정이입 대상은 역시 소녀여야만 했다. 초등학생 어린이여서도 안되었고, 스물을 넘긴 어른이어서도 안되었다.

 - 전사 : 소녀는 더이상 '조력자' '구조대상'으로 있을 수 없었다.

좀 더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영웅이 되기 위해선, 소녀는 남성의 역할이었던 '전사'의 지위를 가져야만 했다.

 

 

 

 

* * *

 

 

 

2013년,

지금의, 내년의 시대는 아직도 미소녀전사를 필요로 할까?

 

90년대 초에 정의되던 '소녀'의 모습에는 보통 중고등학생이 해당되었지만

이제 이 시대에서는 초등학생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지금의 어린 세대는 이 시대에 등장한 미소녀전사를 보면서 

어느 정도의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변신하여 평범함을 벗어던지고 아름다워지며, 전사가 되고 영웅이 되는

그런 소녀를 보고 열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