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계가 자신을 박해한다」:
피오레=애니메이션 팬이 가진「분열적=망상적 태세」로의 고착
그럼,「극장판」의 스토리에서 초반부의 이야기를 한번 보기로 하자.
들러붙은 별의 에너지를 전부 빨아들이는 무서운 기생식물, 키세니안에 씌인 피오레가, 「다음엔 내가 꽃을 가져오겠다」는 어린 시절의 마모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미 우사기라는 연인을 발견한 지구의 마모루 앞에 돌아온 것이다.
어느 날, 마모루와 우사기 일행이 식물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 마모루는 꽃을 보던 중에 저도 모르게 유년 시절의 꿈인지 현실이었는지 구분이 안가는 피오레와의 만남과 이별을 떠올리고 있다.
「나를 잊지 말아」
라며, 꽃말을 구실 삼아 마모루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우사기(나중에 서술하겠지만「나를 잊지 말아」라는 말에는 숨겨진 이중의 함축이 있다만).
우사기는 눈을 감고 마모루에게 키스하자고 조르지만, 마모루는 주위의 눈을 의식하다 못해 그 자리로부터 피해 버린다.
이, 마모루 안의 지금도 우사기를 향한 사랑에 정면으로 상대하기에 일관적이지 못한 마음의 틈을 찌르듯이, 하늘에서 꽃잎과 함께 피오레가 내려온다.
「약속을 지키러 왔어. 네게 줄 꽃을 찾았거든」
라며 정답게 마모루의 손을 잡는 피오레에게, 따라온 우사기는 묘한 불안에 휩싸여선, 마모루의 팔에 다가붙어
「안돼요, 마모쨩, 지금은 내 애인이니까!」
그러자, 피오레는 난폭하게 우사기를 밀쳐 쓰러뜨리며,
「너야말로, 어째서 이런 하찮은 여자애한테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거지? 언젠가는 배신당하고, 혼자가 되고 말거라고」
라며 마모루에게 따진다.
이 대사는, 애니메이션 팬에게 흔히 있을 만한, 살아있는 이성에 대한 불신감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이미 언급한, 부모의 죽음 이래 마모루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버림받는』불안」을, 마모루 자신을 대신하여 마모루의 분신인 피오레가 대변하고 있다고도 받아들일 수 있다.
어째서 마모루는 우사기와 지금이라도 쉽게 키스하지 않는가? 우사기와의 사랑이 너무도 깊어진 후에「버림받는」것에 줄곧 불안을 안고 있는 마모루 자신의 주저 때문이 아닐까…
…그 후「극장판」의 스토리는, 여러 가지 사정이 얽히고서, 결국 마모루는 우사기를 지키려다 중상을 입고, 피오레는 그를 지구 밖 궤도에 위치한 키세니안의 둥지인 소혹성으로 데리고가서, 상처 치료를 위해 수조 같은 박스에 유폐한다.
이 유폐된 마모루의 모습은 흡사 자궁의 양수 속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상태로 마모루와 피오레가 대화하는 장면에 효과음으로서 심장 소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 이쿠하라 감독 본인이,「피오레에게 자궁회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의 암시를 위해」라 인터뷰에서 대답하고 있다[비디오 홍보지 기사에 근거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하나의『외상』체험이며,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자궁회귀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가설은, 프로이트의 직속 제자인 O․랑크 이래 계속 전해져 오고 있으나, 원래부터「오타쿠」에게 자궁회귀 소망이 강하고 컴퓨터나 AV기기에 둘러싸인 밀실은 일종의「전뇌자궁공간」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은, 이미 오타쿠의 내부에서조차 상당히 보편적이며 많은 SF풍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이미 닳도록 쓰여진 모티브에 가깝다(예를 들면 로쿠다 노보루(六田登)의『영 맨』[소학관/빅 코믹 스피릿츠 연재]).
그러나, 어쨌든 작품의 감독 본인이「피오레에게는 자궁회귀 소망이 있다」라 발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피오레=오타쿠라는 표현의도를 거의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필자는「오타쿠에게는 자궁회귀 소망이 강하다」라는 거의「속설」이라 불러도 좋을 발상은, 문제를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고 본다.
설령 출산에 의한 부모로부터의 신체적 분리가 하나의「외상 체험」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출산 그 자체가 유아에게 있어 완전히 수동적인「신상에 닥친 재난」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 어떤 의미로는 태아 그 자체가 자궁의 내부에 계속 들어있는 것이 생리적으로 불쾌해져 모체를 자극하는 측면도 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오늘날엔 태아기에 있어서의 부모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미 부모자식 관계의 시작으로서 파악하는 견해가 거의 보편적이다. 나아가, 출산 후에도, 양육자와의 관계로 장기간에 걸쳐 거의「공생적」인 관계가 지속되어 가는 것이며 그런 중에서 처음으로 심리․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모체로부터의「분리․개체화」가 점차 형성된다.
즉, 출산후의 양육자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모체라는「세계」와의 일체감을 상실하고 나서「개체」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세계」로부터 축복받은 것이라는「기본적 신뢰감」쪽이 우세해진다는 인식은 여러 정신분석학자가 주장하는 바이다.
이러한 매우 기본적 자존감정의 형성은, 단순한 프로세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위기적 단계 극복의 프로세스 속에서 점차「점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여러 단계에서 더 이른 시기에 그 어떤 장애가 발생한 경우일수록 그 후에 발생하는 발달장애는 뿌리 깊은 중증의 것이 된다는 점에서도, 여러 전문가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단, 이들에 단순히 부모자식 관계나 육아의 문제가 아닌, 그 어떤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생리학적․신경학적인 인자가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도 마스터슨(1985) 스스로 시사하고 있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설사 말러가 말하는「공생기」에 있어서의 모자 상호작용이「거의 충분」했다고 하더라도「재접근기」에 있어서 부모가 아이의 자발성을 수용하지 못하고, 아예 자발성을 철거해버린 경우에 부모로부터 보수가 주어지는 관계가 확립되면,「분리-개체화」의 과정은 정지되어 버리며, 그것이 오타쿠의 현세를 헤쳐 나가려 하는 자발적 의욕을 기본적 차원에서 빼앗아 버릴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실은 이런 경우에서 바로, 소위 말하는「오타쿠의 자궁회귀 소망」이 발현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니…이런「회귀 소망」이라는 표현조차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대상관계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그들은, 심리적으로 모자일체인 자궁적 공생공간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바깥 세계로부터 박해당한다」는 경험 그 자체가, 바깥 세계의 외적 타인과 인격적으로 관계할 능력 형성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정신분석 대상관계론의 초석을 다진 영국의 여성 정신분석의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분열적․망상적 태세」의 레벨에서의「투영 동일시」적인 경험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클라인에 의하면, 태어나서 몇 주 된 젖먹이의 체험세계는 자기와 외부 세계와의 선명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 속에 독립한 인격으로서 어머니를 인식하는 능력도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자신 안에서 쾌감이 발생하면,「좋은 엄마」…라기보다「선의로 넘치는 세계 전체」로부터 자신이 사랑받으며, 애정을 공급받고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나, 자신 안이 불쾌한 상태가 되면, 일변하여 세계는 지옥으로 화하여,「나쁜 엄마」…라기보다「악의로 넘치는 세계 전체」로부터 공격당하며, 박해받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자신 안에서 발생한 쾌감․불쾌감이, 자기 자신의「내부에」발생한 감정 체험으로서 인지되지 않고, 스스로의 주위의 타인에게 투영되어, 타인으로부터의 그 어떤 감정적 의지에 말미암은 압력으로서만 인지되는 것을「투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 」심리기제라고 부른다.
여기서 형성되는「어머니」나「타인」의 이미지는, 현실의 외적 타인의 태도의 반영이라기보다, 자신 안의 감정을 외부 세계에 투영한「내적 대상」으로서의 측면이 훨씬 강하다.
물론 유아 안에, 어떤 감정적․생리적 상태가 생기고 그 위에 현실 속 타인으로서의「외적 대상」으로부터의 그 어떤 반응이 선행되어, 영향을 부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유아 그 자신이 주관적인「내적 체험」의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타인」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로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개인의 내면에서의「부모 이미지」와의 관계=「내적 대상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클라인으로부터 시작되는「정신분석적 대상관계론」이다【주】.
그것도 이 시기의 젖먹이에게는 시간을 초월한 계속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동일성 감각이 아직 희박하여, 말하자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에 가까워서, 이런「좋은 엄마」에게 사랑받는「좋은 자신」,「나쁜 엄마」에게 박해당하는「나쁜 자신」이라는 체험은 통합되는 일 없이, 별개의 존재로서「분열(split)」되어 인지된다. 이와 같은 체험 양식을「분열적=망상적 태세」라 부른다.
【주】그 뿐 아니라,「클라인 정통파」라 불리는 사람들(시걸 등)의 이론은 완전히 유아 내부 주관의 투영으로서만 세계와의 관계가 완결되는「유아독존론」이며, 실제로는 외적인 부모자식 관계를 전혀 문제로서 삼고 있지 않다는 비판은 예전부터 존재한다.
위니캇 등의 소위 말하는「대상관계학파[프로이트 정통파와 클라인 정통파 사이에 선「중간학파」「독립학파」라고도 불리운다]」는, 아예 이「클라인 직계파」로부터의 분파로서 당초 성립되었다. 그들은 클라인 류의 내적 대상관계와 현실의 외적 부모자식 관계를 상호작용적인 것으로서 파악하는 식으로 이론을 구축한다.
이와 같이 말하면, 뭔가 특별한 현상과 같이 여겨질지도 모르겠으나, 우리의 일상과도 매우 밀착되어 있는 심리다. 예를 들어「투영 동일시」에 대해서 말하자면, 원래 자신 안에서 발생한 쾌감이나 불쾌감이, 주로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인지, 외부 세계로부터의 영향으로서 발생한 것인지 분명히 판별 가능한 쪽이 사실 예외의 경우인 것이다.
자기 기분이 좋을 때에는 주위의 풍경조차도 활기차게 보이고, 주위의 사람이 자기에게 다정한 착한 사람과 같이 여겨지는 것에 비해, 어두운 기분이 되면 주위의 풍경조차 살벌하게 보이고, 주위의 모두를 자신을 경시하거나 격 없이 자신을 계락에 빠뜨리려 하는 존재 로서 받아들이는 등 누구라도 가끔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시기에는 찬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명인을, 하나의 스캔들을 계기로 불과 몇 주 후에는 아주 옛날부터 악인이었던 듯이 취급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대상의 분열」기제의 발현이라고도 한다. 아마 찬사받던 시점에서의 그 인물은「좋은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투영받고 있었던 것이며, 비난당하는 시점 등이 되면「나쁜 대상」으로서의 이미지의 투영으로 역전된다. 그것은 어느 쪽이든「외적 대상」으로서의 그 사람 자신의 리얼하고도 복잡한 맑고 흐림을 병합하는 실상으로부터 큰 폭으로 해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스터슨,1972은, 이「분열적-망상적 세태」에 고착된 상태의 정도가 강하여 분리-개체화하지 않는 부모자식 관계에 있는 아이는, 실제로는(앞서 서술했듯이) 자신의 자발성을 저지하고 있는 면이 있는 현재 현실의 어머니에게「좋은 어머니」상을 줄곧 품고 있기에「나쁜 어머니」상을 분리하여 외부 세계에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내적 공상의 영역에서는「다정한 친어머니」와「심술궂은 계모」라는 식으로 분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이미 2장에서 언급했다).
이것이 그야말로 피오레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피오레에게 있어서는, 쾌적한 체험은 이미 전부「키세니안」이라는 대리모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며, 모든 고통이나 불쾌한 체험은 자신(과 키세니안과 마모루) 이외의 모든 타인으로부터의 자신에 대한 박해로서 받아들인다…는 식으로「투영 동일시」와「대상의 분열」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피오레에게는 세일러 문=츠키노 우사기에게「나쁜 어머니」상을 투영한다는 터무니없는 전도가 발생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나아가, 피오레는「마모루군을 괴롭히고 외톨이로 만든 주위 놈들에게 복수해 주겠다!」라는 의미의 말을 반복해서 하나, 피오레는 언제 어디서 마모루가「주위 놈들에게 괴롭힘 당하는」것을 관찰했단 말인가? 애초부터 어린 시절의 마모루가 외톨이였다는 사실조차, 어디까지나 사고로 부모를 잃은 탓 아닌가? 피오레는 태어나고서 겪은 자신의 고독감과 박해당한 느낌을 마모루에게 투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어린 시절에 만났을 때와 같이, 마모루와 자신은 한 몸으로, 지금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환상」이 피오레 안에서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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