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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김현진의 이상한 나라의 TV : 소녀는 죽지 않는다

Endy83 2007. 11. 12. 15:09

 

 

 

소녀는 죽지 않는다 [2007-07-13 19:07]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텔레비전에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이 방영되어 소녀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찰싹 끌어당겼던 것이 벌써 십여 년 전이지만 아직도 세일러문은 건재하다. 시즌을 거듭하며 철없고 나약해 빠진 소녀였던 세라가 어엿한 달의 여왕으로 태어나듯 심지어 근래에는 세일러문 실사판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니 세일러문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고작해야 예쁘고 잘 빠진 여고생들이 단체로 나와 어이없는 유머나 중얼거리다가 변신하고 봉 몇 번 휘두르면 악당들이 쫓겨나가 버리는 어이없는 만화, 심지어 그 긴 변신 시간 동안 악당이 덤벼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악당들이 죄다 엄청나게 매너 좋은 악당임이 틀림없다는 농을 샀던 유치한 세일러문이지만 나 역시 세일러문의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매주 수, 목만 되면 브라운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아이 중의 하나였다. 엄청나게 짧은 스커트, 그리고 그것으로 갈아입기 위해 들여야 하는 엄청나게 긴 시간, 과연 잘 빠진 다리를 가진 미소녀 여고생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빠지면서도 나는 브라운관 앞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평범한 소녀들의 시대를 증언하다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은 소녀시대를 증언한다. 유치한 공식에 둘러싸인 변신소녀물에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은 소녀의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었다.
이전의 학교를 배경으로 한 변신 소녀들은 언제나 바보처럼 하염없이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세일러 전사들은 어딘가 죄다 약하고 부족한 아이들이었다. 덜렁거리고 민폐나 끼치는 세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공부 잘하고 착한 척 하지만 어딘가 재수 없는 모범생 유리, 겉멋이나 잔뜩 들어서 연예인이 되겠다고 설쳐대는 미나, 거만하고 목에 깁스라도 한 듯 빳빳했던 비키, 키만 멀대 같이 크고 항상 주춤거리던고 소심했던 리타... 필요 이상으로 잘 빠진 다리만 빼놓으면 이들은 모두 천사도 아니고 세일러 전사도 아니라, 어딘가의 옆집에서 몇 다스고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소녀들이었다. 세상을 위해서라느니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하다느니 하는 소리하지 않고, 남자친구를 위해 목숨 걸고 연예인을 쫓아다니고 빵 하나에 피 터지게 싸우고 학교를 땡땡이 치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보통 소녀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왁자지껄하고 시끄럽기만 했던 소녀들의 이 세계는 확장되었으며 때로는 기괴해졌다. 섹시한 모니카와 공공연히 남장을 하고 다니는 테리, 두 외행성 전사는 심지어 떳떳하게 레즈비언 관계를 과시한다. 언젠가 엄마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상뿐인 십 육, 칠 세의 때에 세라는 여고생의 신분으로 낳은 기억 없는 미래에서 온 자신의 딸을 만날 뿐 아니라 당분간 그 아이를 양육하여야 할 의무까지 지게 된다.

 

어째서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거지?
 
시리즈 후반에 등장하는 세일러 스타즈는 평소에는 남성 아이돌 스타의 모습이지만 세일러 전사의 모습으로 변신하면 여성으로 변모한다. 이 기괴하고 변태스럽기까지 한 세계는 단 한 마디로 압축되는데, 그것이 즉 ‘소녀시대’, 소녀들만이 통과하는 음울한 세계인 것이다. 그 길고 지루한 통과의 와중에 어떤 소녀들이 겪는 힘과 남성에의 선망,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너무나 초라한 슬픔... 그러나 세일러 전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엄청난 힘을 세계의 지배나 정복에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바보처럼 단순한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사용한다. 모든 싸움에서 언제나 그들이 중얼거리는 말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지만 소녀들은 그 대상을 죽여서 이 세상에서 말살시키려 하지 않고 오직 빛으로 갱생시키려 한다. 물론 그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본질을 바꾸겠다는 생각 역시 어떤 의미에서의 폭력이지만, 오로지 소녀들의 중얼거리는 목적은 하나뿐이다. “어째서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거지?”

 

소녀시대를 지난 모든 여자는 언제나 소녀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 단 하나의 생존자만이 남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비장하게 싸우는 동안 소녀 전사들은 비록 적이 그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 길을 쓸데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이 약하고 착한 소녀들의 세계는 무척이나 깨지기 쉬운 것이라서, 엔딩에 이르러 세라를 뺀 모든 캐릭터는 하나하나 죽음을 맞는다. 이 과정에서 이 애니메이션은 필요 이상으로 죽어나가는 캐릭터들을 오래 관찰하고, 그들이 어떻게 단말마의 신음을 뿌리며 비참하게 죽어나가는지 차갑게 보여준다.
자신을 사랑하고 따르고 협력했던 모든 이들이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죽음을 맞는 장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노란 병아리’라고 연인에게 놀림 받던 철없는 소녀는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다.’라는 슬픈 현실과 ‘모든 소중한 것은 언젠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라는 엄정한 진실을 마주한 후에야 엄숙한 달의 여왕으로 거듭난다. 이렇게 하여 소녀시대는 종말되지만, 소녀시대는 결코 굴복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가?’ 라는 순진한 고민이 그 가슴 속에서 종식되지 않는 한, 때로는 청순하고 때로는 바보스럽고 때로는 한심하지만 그래서 사랑스러운 소녀시대는 한때 소녀였던 모든 여자의 가슴에서 결코 끝나지 않고 되살아나는 것이다.

 

 

필자 : 김현진

출처 : 매거진 T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12002003&article_id=46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