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억지로「어른」으로 몰리다:
성인 대상 동인지의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강제당한 환희」모티프
그럼,『거짓자기』에 의한 적응이, ‘진정한 자발적 및 내발적인 소망충족’이라는 것을 모른 채, 타인으로부터 그러한 소망을 품어「야만 한다」고 강제당한(이라 최소한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망을 실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 오타쿠의 세계에서 한 가지 예증을 들어 보기로 한다.
오타쿠인 사람들은 과연 작품 그 자체를「즐기고」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재미있는 작품과, 재미없고 싱거운 작품을 구별하는 작품의「감식안」이라는 것이 심히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카라사와(1994)가 지적했듯이,「오늘날의 오타쿠는, 츠키노 우사기라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츠키노 우사기라는 캐릭터가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 셀화를 소중하게 여기는」식으로, 묘하게「쿨」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그 작품이 붐이기에, 그런 같은 작품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일체감」속에서 열광하는 척만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표현하고픈, 묘하게「공허한 열광」인 것이다.
물론 무릇 유행이라는 것인만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이유로 영합적으로 일체감에 빠지려 하는 측면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팬이 가진 특정한 작품을 향한 부화뇌동적 눈사태 현상은 무언가가 다르다. 음악이나 탤런트에 관해서는, 오히려 예전보다도 개개인의 취미가 세분화되어「국민적 대스타」가 생겨나기 힘들게 되어 있는 요즘 시대에, 애니메이션 팬만이 오히려 예전보다도 불어난 특정한 하나의 색으로 물들기 쉽게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그 대상이 현재는『세일러 문』이라는 것이 된다만).
그리고 작품 그 자체를 향한 감상이나 비평 같은 것에는 예전보다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서, 인기 있는 작품의 캐릭터를 원래의 스토리로부터 떼어내, 속된 말로「야오이」라 불리우는, 이야기의「山なし、オチなし、意味なし(절정 없음, 위기 없음, 의미 없음)」식의 기승전결조차 없는, 그 세계 사람들만 알만한 에피소드의 단편으로서 동인지의 세계에서 재구성된 것을 즐기는 것이다.
요컨대, TV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는, 등장인물끼리의 숨겨진 연애나 매일의 생활 등을 망상하여, 자기들 멋대로 단편적인 에피소드로「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이 작품의 본질에 더욱 깊게 접합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동인지에서 그려지는 에피소드의 패턴 그 자체가, 오늘날 심각히 고착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만일 그 이야기에 미형 남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하면, 적군 아군 관계와는 상관없이, 그런 인물의 동성애 에피소드를 거의 순서조합적인 패턴으로 강박적이도록 차례차례 창출해 낸다.
그 뿐만 아니라, 원작자의 개성적인 필체를 따라갈 필요조차, 최근의 동인지 작가는 중시하지 않는 듯하다. 마침 한 시기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丸文字(마루지)」라 불리는 서체가, 누가 쓰든 모두가 똑같이 보였던 것과 같이, 거의「동인지 얼굴」이라 부르고 싶어지는 획일적인 남녀의 그림체가 실로 세련된 식으로 확립되어 있으며, 그 캐릭터가 세일러복풍 레오타드를 입고 있으면『세일러 문』을 가리키며, 격투복을 입고 있으면『란마1/2(원작:타카하시 루미코, 소학관『소년 선데이』연재)』일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개별 캐릭터의 개성이 빠져나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머리 스타일이나 복장으로 구별하지 않으면, 디자인만으로는 어느 애니메이션 작품의 동인지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미, 이는 그 시기 유행하는 작품의 등장인물의 이름만을 갈아 붙여서, 매뉴얼화된 몇 가지의 이야기를 연기시키는 것을 반복하는「옷 갈아입히기 인형」의 세계인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오타쿠의 상당한 부분에서 작품과의 만남은, 이미 자신과는 다른 개성을 가진「타인」으로서의 등장인물이나 작품과의 생생한 만남과 교류 속에서 무언가 예상 외의 신선한 경험을 쌓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망상의 세계를, 그 시기 인기 작품의 등장인물에게 강제로「투영하고」있는 것일 뿐이다1).
그러한 내적 망상의 투영 속에서 단조적이도록 반복되어 그려지고 있는「스토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소위 말하는「성인 대상」동인지가『세일러 문』의 캐릭터를 재료로서 삼고 있는 경우, 거기에서, 놀랄 정도의 확률로 즐겨 그려지고 있는 스토리의 패턴은,「이미 성에 눈을 뜬 세일러 전사가, 아직『순진』한 다른 멤버를 억지로 범하여, 성에 눈을 뜨게 한다」는 동성애 스토리이다. 필자가 훑어본『세일러 문』성인 대상 동인지에 있어서는, 남성 캐릭터끼리의 동성애나 남녀 캐릭터의 성묘사보다도 훨씬 많은 비율로 이 패턴이 그려져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스토리에 있어서는, 자신 안의 성적「욕망」은, 타인의 힘으로 강제로 눈이 뜨여서 억지로 끌어내어지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으로 인해「눈을 뜨게 한」상대와의 폐쇄적인 관계 속에 예속당하고 복종당하게 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어른으로의 성인식이자 쾌락원에 발을 들여 놓는 것으로서 그려져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오히려 그 인물의「순수함」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여, 타인에게 잠식당하여 어둠의 혼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목졸림과 무력감에 넘치는 스토리의 결말과도 같이 여겨질 뿐이다.
물론, 불행하게도 적지않은 여성의 성으로의 각성은 이와 같이 수동적․강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현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범하는 남성」이 부재한 이야기를 남성독자조차도 즐겨 보는 것일까? 이러한 성인 대상 동인지의 저자나 독자나 남녀가 혼재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어느 쪽이 많다고 조차 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다. 한편,(언뜻 보기에 상당히 의외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으나), 남성 오타쿠는, 세일러 전사들이 남성에게 강제로 범해져 처녀를 상실하는 이야기는 오히려 보고 싶어하지 않는 듯이조차 여겨진다(우연일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훑어본 동인지 중에서 이런 패턴과는 아직까지 한번도 조우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들의 정신 구조는 사춘기의 여성을 힘으로 정복하는 식의 스토리에도 견딜 수 없는 것이리라. 앞에서 서술했듯이, 이성간의 섹스로서 그려지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세일러 전사 쪽이 숫남성 캐릭터를 부드럽게 에스코트해 주는 유혹자라야만 한다(「어머니」가 제공해 준 대상 이외의 것으로 욕망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서로 사랑하는 두 명의 성적 교섭 장면이 그 동인 작품의 스토리의 본 줄거리가 아닌 경과적 장면으로서 그려져 있는 정도이다. 어쨌든, 압도적으로 세일러 전사끼리의 여성동성애 스토리가 많은 듯하다.
애초부터, 남성이 성인 대상의 영상이나 잡지를 볼 경우,「범하는」남자 쪽에서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인지「범해지는」여자 쪽에서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가 아닐까. 『빅 코믹 스피릿츠(소학관)』에 연재되는 아이하라 코우지의『1코마 만화선언』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던 적이 있었으나, 거기에 시사되어 있었던 것은, 실은 남자는「범해지는」여자 쪽에 무게를 두고 성인 비디오에 감정이입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페니스 선망이 있다는, 페미니즘의 현대에서는 실로 평판 나쁜 정신분석 학설에 대응하는 것으로서,「남성은, 여성이 처녀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어떤『선망』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지는 않을까? 남자는, 많은 경우에서 동정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일지언정, 자기의 순수함을「빼앗기는」체험으로서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남자는,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의「순수함」과 그「영원한 상실」을 상징해 줄 증명은 소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즉, 남자 안에서 자신의「순수함」을 수동적으로 강제로(그것도「침입적으로」)박탈당하고, 강제당한 쾌락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스토리」를, 작품 세계 속의 범해지는 처녀를 구실로「반복 강박」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심적 외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경우, 범하는 주체 또한 여성이라는 스토리에서는, 어떤 적절하고도 편리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요컨대, 다른 세일러 전사에게「범해지는」세일러 전사는 그것을 읽는 오타쿠(성별불문【주】) 그 자신이고, 페니스를 대신하여 억지로「어머니」의 유방이 입 안에 밀어 넣어지고 독을 주입당하여「참자기」의 싹틈을 저지당함으로서,「어머니」가 기대하는「소망」을 품는 경우에만 수용받게 되는 스토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 이는, 오타쿠가 유소년기(재접촉기)에 체험한, 개체화를 향한 욕구의 철거 및『참자기』의 싹틈의 상실과『거짓자기』형성이라는 체험을 상징해 주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강제당한 환희」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아이다운 자유로서의『순수함』을 빼앗기고,『어머니』와의 공생적인 닫힌 공간에서,『어머니』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만족만을 만족이라 느끼도록 강제당한 세계=『집』안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를 갖고 싶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야, ……는 어때?」라 앞질러 내밀어 준 것을「응」하고 수동적으로 수용해서밖에 얻을 수 없는 마조히스트적 쾌락.
【주】「『어머니』에게 자발성의 싹틈을 저지당하는」경험은 당연히 여성의 유아체험에도 있을 수 있는 점이므로, 여성 오타쿠가 동인지의「범해지는」쪽에 감정이입하고 읽을 경우에「체험」하고 있는 것은 예상외로 남성독자와 공통된 차원의 것일 가능성이 나오게 된다. 현실에서, 남성에게 강제로 육체적 처녀를 빼앗긴 경우가, 오히려 이렇게 유소년기에 부모로부터 개체화된 어린이다움의 싹틈을「빼앗긴」경험의「재탕」정도의 의미만을 가지는 경우조차 있으리라.
위니캇(1965)도, 유소년기에 자신의 그야말로 퍼스널적인 영역을 강제로 침입당하여 자발성의 싹틈을 박탈당하는 유아의 경험은, 실제로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강간당하는 것이나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도 심각한 체험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1) 츠치다,19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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